
왕돈까스와 냉면
난 미식가는 결코 아니거니와 오히려 입맛이 매우 저렴한 축에 속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미식이라는 행위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다른 감각의 충족도 그러하듯, 미각의 충족이란 것도 철저히 상대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명한 쉐프가 해다준 고급진 재료의 기가막힌 음식이라도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이 우여곡절끝에 억지로 따서 먹는 통조림의 첫 술만큼 맛있겠는가..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점심을 굶고 허기진 상태에서 집에 들어가면 애들이 먹다 남긴 식은 반찬이나 스파게티도 꿀맛이다. 더 맛있는게 먹고 싶다면 아침도 굶으면 된다. -_-;; 이렇게 손쉽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굳이 힘들게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닐 에너지가 내겐 없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섬세한 미각의 충족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집근처의 왕돈까스와 냉면 -_-;; 언젠가부터 돌아다니다보면 저렇게 왕돈까스와 냉면을 매칭시킨 분식집이 주변에 많이 관찰되었다. 집사람과 분석하기로, 남자들에 젤 무난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돈까스이고, 상대적으로 여자들은 냉면과 같은 면류를 잘 시켜 먹으니 누군가 저러한 조합을 생각해낸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웠었다. 낙성대 인근에도 왕돈까스&냉면집이 있는데 이 집이 참 클래스가 있다. 온 가족이 종종 이곳에 들러 수제왕돈까스 곱빼기, 새우볶음, 비빔냉면을 시키면, 2만원 안쪽으로 네식구가 배불리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식사를 할 때 나는 돈까스 고기와 비빔냉면에 싸서 함께 먹는데 (고기를 야채에 쌈싸서 먹듯) 그 맛이 참 찰지다. 돈까스의 달착지근한 소스와고소한 튀김옷이 매콤한 비빔냉면의 국수와 입안에 어우려질 때,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좀 더 포괄적으로 “고기를 면류에 싸서 먹는 방식”은 내 기억에 10여년 전 대전 신성동에 기거하던 고등학교 친구 김모군을 만나 동네 고깃집을 갔을 때 그가 가르쳐 준 것이다. 고기를 막 시켜서 굽고 있는데 갑자기 냉면을 턱하고 시키더니 (아직 고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익은 고기를 면에 싸서 마치 밥과 밥반찬처럼 먹는 게 아닌가….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고… 그 이후 나도 종종 생각나면 고기를 냉면이나 소면 같은 면요리와 함께 (끝나고 식사로 먹는게 아니라)먹었다. 최근에 숯불고기와 냉면을 함께 파는 식당도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이런 방식이 뭔가 메리트가 있긴있나보다.
여하간 캐나다에 집사람과 아이들을 두고 혼자 먼저 귀국해서 왕돈까스와 냉면집을 지나갈 때마다 생각이 난다. 혼자 들러서 돈까스와 냉면을 하나씩 시켜놓고 여유롭게 한번 먹어볼까? 그러면 뭐 좀 맛있을까? …글쎄다…. 달콤함과 매콤함의 조화고 나발이고 전부 헛소리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왁자지껄 애들 먹이는 와중에 나도 틈틈이 겨우 면과 돈까슬 섞어 게눈 감추듯 먹어서 맛있었던 것이겠지….
내일이면 드디어 가족들이 돌아온다. 오랜만에 왕돈까스&냉면집에나 가봐야겠다.
(어차피 혼자 있는 주말, 병원에 피서나와서 학회 발표자료를 만들다가 또 딴길로 새고 말았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