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래의 기록..
오늘 소아 일반외래를 보러갔는데 환자가 한 명뿐이라 아메리카 스타일로 30분이상 천천히 진료를 했다.
마침 환아는 대구에서 올라왔고 보호자에게 물어보니 내가 나고 자랐던(유치원 때 이사를 갔지만) 북구 산격동, 체육관 근처에 사신다기에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환아는 발달장애를 동반한 원인미상의 뇌성마비를 가지고 있었고 보호자는 사실 환아의 위탁모였다. 친모는 미혼모였고 이 아이가 10개월 때부터 보호자가 위탁받아 키웠다는데….
예전같으면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갔겠지만 이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 보호자에게 사실 이 아이는 세번째 위탁아동으로 본인의 딸이 두명이 있,고 그 딸들 사이에 여아 하나… 그리고 이 환아와 세딸 사이에 아들하나.. 총 다섯명의 아이(그중 셋은 위탁)를 키워오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시게 되었나 싶어 여쭤 보니… 본인의 두딸이 터울이 많이 져서 고민 중, 주변에 부모 없이 크는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오빠가 옆에서 자꾸 도둑질을 시켜서 보다 못해 며칠씩 데리고 와서 지내다가 그냥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인연이 닿아 자꾸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그 첫번째 여자아이는 무사히 잘 커서 간호사 일을 하고 있고 시집가길 기다리고 있단다.
한 명의 인간이 태어나 자라고 성인이 되는 일은 세상에서 너무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안에 상상하기 힘든 노력이, 사랑이 필요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 평범해 보이는 아주머니로 하여금 다른 이의 자식들을 포함한 다섯명의 ‘사람’을 키우게끔 만들었을까? “교회나 성당이나 절을 다니세요?”라고 물어 봤지만… 그런거는 아니라고 하셨고… 이런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자신의 선행을 showing off 하려는 냄새도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사람이 아이를 키울때 풍기는 노곤한 평화로움만 가득했다.(솔직히 나는 그 와중에도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키우는데는 뭔가 현실적인 동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계속 품었다.)
부모의 사랑도, 남녀의 사랑도, 효도도..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대입시키면 쉽사리 설명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 낯선 현상은 무엇일까? 예전에 스캇 팩 박사의 책을 읽고나서 사랑이라는 것은 정량화 할수 없지만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가 아닐까 상상했었다. 우리로 하여금 이성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애를 쓰며 그 아이들을 또 키우고… 길거리의 수많은 인파들이 다 그렇게 만들어져서 또 늙다가 죽어간다. 이 거대한 움직임과 순환을 설명하는 에너지,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게 아닐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어두운 면에 주목하고, 그러다보면 그런 것들이 이곳을 지배하는 것 같아 절망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굴러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 지극히 평범한 곳에서 나온 작은 힘이 모이고 모여 어둠을 몰아내면서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간만에 낭만적인 생각에 빠져 외래를 마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