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매를 떠나며 나는 쓰네
잘 있거라, 당직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보라매 공원의 가을 낙엽들아
한창 EPL좀 보려면 12시에 칼같이 꺼지는 당직실의 대형 액정TV야, 잘 있거라
맵고 짜지만 중독성 있는 미사랑의 라밥아
집사람 빨래 수고를 덜어준 전공의 의국아
잘 계세여, 센스있게 콜 모아서 해주신 간호팀 님들하
연말고사 치듯, 나 이제 벼락같이 off duty note를 쓰네
가엾은 나의 연말턴, 본원에 갇혔네
(원작은 기형도님의 명작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