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5>함안(咸安) 조(趙)씨 정순(貞順) 1925.12.10~2024.12.21

<사람 이야기 #5>함안(咸安) 조(趙)씨 정순(貞順) 1925.12.10~2024.12.21

얼마 전 한국나이 100세 생일을 맞으셨던 할머니께서 지난주 토요일 임종하셨다. 몇 일 전부터 상태가 악화되셨기 때문에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멀리 있는 터라 잠시 고민을 했지만 마지막으로 할머니 가시는 길을 뵙는게 도리인 것 같아서 급히 표를 구해 짧게 한국을 다녀왔다. 다행히 일요일 오전 의성에 도착해서 입관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할머니 얼굴을 뵙고 산소까지 모셨다. 캐나다로 돌아오는 비행기, 공항에서 곰곰히 할머니의 삶을 곱씹어 본다.

나의 할머니는 일제강점기가 한창이던 1925년, 길안천 지류가 아름답게 굽이 치는 경북 청송군 안덕이란 곳에서 출생하셨다. 태어나시고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할머니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숙모와 올케 언니가 양육을 맡아 주셨다고 하나 천덕꾸러기 신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을 때이니 할머니의 아버지를 비롯한 주위 어른들로부터 ‘저 아이가 인간이 되기는 글렀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으셨다고 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 나가셨다. 내게 들려준 일화는 만주에 다녀온 큰 오빠가 몸이 약한 여동생을 위해 무슨 약 같은 것을 구해왔는데, 그 약을 먹고 산에서 변을 보니 지렁이 같은 벌레가 한 무더기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아마 구충제 같은 것이었나 본데 이후 건강이 확연히 좋아졌다고 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성인이 되었고 1946년에 의성군 사곡면에 있는 진성이씨 집안의 이 호(琥)자 락(洛)자 청년에게 시집을 왔다. 시집을 와서 두 아들 즉, 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생활을 5년도 채우지 못할 무렵 6.25동란이 터졌고, 나의 할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셨다. 할아버지는 지력과 용력이 대단하셔서 당시 사곡에 있는 시골 청년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피끓는 젊은이들이 많이 그랬듯, 나의 할아버지는 좌익사상에 경도되었고, 6.25 발발과 동시에 처단대상이 되어 쥐도새도 모르게 희생되었다고 한다. (처단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기이한 2024년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여하튼 할머니를 포함한 남은 식구들은 이후 무수한 고초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으셨다. 허나 그녀 앞에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두 아들, 그리고 장남을 잃은 시부모를 모시는 청상과부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증조할아버지께서 어느 정도 재력을 일구어 놓으셨고(안타깝게도 아들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재산을 소모하셨다고 한다) 홀로 된 며느리를 측은히 여겨 아껴주셨다 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질곡의 고스란히 담긴 할머니의 삶이다. 비단 우리 할머니 뿐이겠는가?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 중에 비슷한 이야기 보따리 품지 않은 분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안타깝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고, 인간의 생생한 기억들도 죽음들과 함께 저 뒤편으로 사그러진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몇 가지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1. 한국표범
어릴적에 할머니로부터 처녀 시절 목격하신 호랑이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안덕 마을 함안 조씨 일가 중 포수가 있었는데 어느날 범을 잡아와서 온 마을에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할머니도 쫒아가서 범을 구경했는데 사람들이 그 고기가 악귀를 쫒는데 용하다고 한 점이라도 얻어가려 난리법석이었다 한다. 내가 조금 더 한국 호랑이와 표범, 즉 아무르 호랑이와 표범의 생태를 알고 난 이후 자세히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짐승은 호랑이는 아니고 표범이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을 ‘범’이라는 용어로 통칭해서 불렀기 때문에 생긴 착오였을 것이다. 할머니가 묘사하신 범의 생김새는 호랑이의 줄무늬가 아니라 표범의 매화무늬였으며, 크기가 조금 작았다. 궁금증이 일어나 청송 지역의 표범 포획기록을 구글에서 찾아보니 조영걸이라는 분이 1942년 4월 2일에 청송 안덕 연점산에서 표범을 포획한 기록과 사진이 나온다. 할머니께서는 범을 잡은 포수 분의 집안이 이후에 쇠락하고 본인의 삶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회고하시며 짐승 같은 것을 사냥하고 다니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사냥은 아니지만 낚시를 갈 적 마다 심히 찔리는 부분이다.

2. 시골에서 보낸 일주일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나혼자 대구의 가족을 떠나 의성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일주일을 머무른 적이 있다. 서울 사람들은 비웃겠지만 나름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 입장에서 그때 시골에서의 생활은 상당히 강력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만해도 시골의 모습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와 같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에는 집집마다 아궁이에서 떼는 화목 냄새가 가득했고, 외양간에는 소가 매어 있었다. 동네 야산은 나무들이 베어져 거친 풀만 덮혀 있었고, 풀 뜯으러 돌아다닌 소들의 소똥이 군데군데 지뢰처럼 자리 잡았었다. 달식이라는 동갑내기 친구를 사귀어서 동네 앞 개천에서 반도(족대)로 붕어, 피래미도 잡고, 저수지 뚝을 뛰어다니며 풍뎅이도 잡고 그랬다. 그때 시골집은 지금의 양옥이 아닌 사랑채가 딸린 한옥이었다. 집 안에 디딜방아도 놓여 있었고, 마당 한 가운데는 우물과 멋드러진 향나무가 있었다. 그러던 중 정말 팔뚝 두께만큼 두꺼운 누런 황구렁이 한 마리가 시골집 담벼락 위를 기어가는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할머니께 도끼를 가져달라고 소리쳤다. 내심 때려잡겠다는 심산이었나 보다. 뛰쳐나오신 할머니는 저런 구렁이는 잡는 거 아니다며 나를 혼쭐을 내시고 구렁이가 사라지기를 함께 지켜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과자가 귀했던 그 시절 손자에게 요깃거리 해주신다고 동네 구판장에서 산 라면을 기름에 튀겨 설탕을 뿌려 주셨는데 그때 그게 참 맛있었다.

3. 성덕도(聖德道)
할머니는 평생을 성덕도라는 경상북도에서 창도된 민족종교에 몸을 담으셨다. 나에게 본인이 성덕도에 의탁하게 된 이야기를 여러번 해주셨다. 시골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들과 함께 생활을 이끌어 가던 중 허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성덕도를 통해 통증이 치유되는 체험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큰 은혜를 입었으니 평생에 걸쳐 갚아야겠다고 맹세를 하셨다고…. 그러나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유교 중심의 전통에서 며느리의 종교활동이 자유로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시아버지, 즉 나의 증조 할아버지를 찾아가 본인의 결심을 전했다. 한학에 밝으셨던 증조 할아버지는 성덕도의 경전을 쭈욱 읽어보시고 내용과 뜻이 좋으니 기꺼이 며느리의 종교활동을 허락하셨다고 한다. 학교 근처도 가본 적이 없는 할머니는 한자로 되어 있는 그 경전을 통째로 외우시고 셀 수 없이 암송하셨다. 덕분에 한글도 깨치게 되셨다. 어릴 때 부터 늘 TV를 보면 할머니는 화면 아래 자막글자를 떠듬떠듬 읽으시며 연습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본인이 회갑이 되고서는 의성의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종교생활에 뛰어드셨다. 전국에 있는 성덕도 교화원들을 다니시며 일종의 성직자 같은 생활을 하셨다. 남해, 풍기, 온양, 문경 등 아버지와 함께 어릴 적 할머니가 계시던 곳을 쫒아다닌 추억이 선명하다. 비록 후손에 이르러 성덕도를 이어받은 사람은 없고, 종교는 다르지만 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전력으로, 흔들림 없이 신앙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할머니 우여곡절 많은 인생에서 종교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절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게 어떤 종류의 종교이든 말이다.

4. 할머니와 둘이 보낸 시간
연수를 나오기 직전 2022년 겨울, 서울의 작은 아버지 댁에 계시던 할머니를 급하게 의성으로 모셔야할 일이 생겼었다. 마침 내가 시간이 되어 퇴근하고 차를 몰고 작은 아버지 댁에 들러 할머니를 모시고 의성으로 달려갔다. 내려가는 중앙고속도로에서 갑자기 함박눈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혹여 사고가 날까봐 조심조심 운전했지만 그때 내리던 눈은 시릴정도로 아름다웠다. 뒷자리에 계신 할머니와 단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직감했다. 할머니와 이렇게 시간을 보낼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래서 이미 다 들은 이야기들이지만 또 여쭙고 또 들었다.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는 것도 그 덕택이다. 대화의 와중에 할머니께 그래도 나이 먹어서 하나라도 좋은게 있으시냐고 여쭤봤더니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도 없다.” 뭐가 제일 아쉬우냐는 나의 질문에 “맘대로 못 돌아댕기는게 젤 싫다. 어데 꿈짝 거리기 쉽지 않으니 그게 질로 싫다.”고….

돌이켜보건데 할머니가 자애롭거나 온화한,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의 할머니는 아니셨다. 오히려 엄하고, 단호하고, 성마른 모습이 많으셨다. 굳이 비유한다면 ‘손웅정’ 님 같은 모습이랄까? 기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본질적인 골격과 근육만 두드러지게 남아 있는 이미지… 그러나 할머니의 인생을 생각하면 그런 모습은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생존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유전자의 1/4은 온전히 할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다. 슬픔의 무게를 분수로 표현할 수 있겠냐만은 가족을 먼 곳으로 보내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열정’이나 요즘 소위 말하는 ‘꺾이지 않는 마음’ 같은 것들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 할머니로부터 왔을 것이다. 연수 나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시골에 인사 드리러 갔을 때 이미 할머니의 기력이 많이 쇠하신 상태였다. 마지막 밤, 일부러 할머니 곁에서 잠을 청했다. 할머니의 온기와 숨결을 느끼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현실이 되어 24년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차가운 할머니를 다시 뵙게 되었다. 솔직히 크게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일찍 결혼을 해서 증손자를 안겨드렸을 때, 그 때 할머니의 환한 웃음을 보았을 때, 나는 이미 손자로서 내가 할머니께 드릴 수 있는 최고를 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짠하다. 우리 할머니 조정순 여사가 지금 같은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온갖 외국어도 배우고, 세계를 곳곳을 누비고, 응원봉도 흔들고, 뜨거운 에너지로 멋진 여성의 삶을 사셨을 텐데 말이다.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지만 우리 할머니만 생각하면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세상에서 하고 싶으신 것 마음껏 누리고, 누비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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